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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순노인 억척 `민간 미술관` 눈길 - 한광 미술관 14일 부산서 첫 개관
칠순의 노인이 한 평생 심혈을 기울여 수집한 5백여점의 미술품을 시민들과 함께 감상하고 즐기기 위해 부산 최초로 민간 미술관을 개관한다.
문체부에 미술관 (제1종)등록을 마친 뒤 14일 오후2시 개관식과 함께 문을 여는 "한광미술관"(부산 중구 중앙동 4가 82)은 관장 한광덕씨(78.중구 신창동 2가 21)의 한 평생 "그림사랑"의 결실.부산은행 대창동지점 4층의 약 1백평 규모 미술관에 선보일 미술품은 조선조 및 근.현대 한국화 1백70점을 비롯,서예 병풍 북한화 일본화 중국화 서양화 등 5백50여점이나 된다.
한관장이 광복 후부터 50여년간 수집한 이들 미술품 가운데는 조선조 화단의 대표적 작가들인 단원 김홍도,혜원 신윤복,오원 장승업 등 "3원"과 겸제 정선 등 "3제"를 비롯해 근.현대작가인 소치 허유,남농 허건,월전 장우성,청전 이상범,이당 김은호 등 대가들의 작품이 수두룩하다.또 추사 김정희,석봉 한호,다산 정약용,영친왕,민영익,박영효,김옥균,백범 김구,해공 신익희,박정희 전대통령 등 명필과 유명정치가들의 친필 서예작품도 한 자리를 잡게 된다.
"우리 문화재가 해외로 유출되는 것을 나름대로 막아보려고 한 것이 미술관 개관의 시발이 된 셈"이라는 한관장은"미술관 개관은 그동안 수집한 작품들을 시민들에게 지속적 제도적으로 공개,작품을 사회에 환원한다는 뜻도 있다"고 강조한다.
"젊은 시절 월급은 물론 아내가 생계를 위해 따로 벌어들였던 돈까지 써가며 미술품을 모아들이다 아내로 부터 "이혼하자"는 소리까지 듣기도 했다"는 한관장은 "앞으로 소장품을 주제별로 분류,몇개월씩 교체 전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백태현기자>
 
  “척박한 불모지에 씨앗을 뿌리는 마음으로”
작년과 올해 국제영화제를 열고, 동아시안 게임을 개최한 국제적인 항구 도시이면서도 문화예술의 불모지라는 딱지를 달고 살아온 도시, 부산에서 50년 동안 고서화를 수집해 온 외곬수 수집가가 있어 화제를 모으고 있다.
부산 최초의 사립미술관인 한광(韓光)미술관(부산 중구 중앙동 소재)을 개관한 한광덕(78세)관장이 그 주인공이다. 한 관장은 지난 20년간 현 위치에서 전시관을 운영해오다가 ‘96년 11월에 문화체육부에 사립미술관으로 등록하고 지난 6월 14일 개관식을 가졌다.
한광미술관은 조선시대 서화 (63점), 근대 서화 (44점), 현대 서화(63점), 서예작품(63점), 병풍(36점), 북한 산수화(74점), 일본서화(170점), 중국 서화 (22점), 프랑스 판화(14점)와 수채화(2점) 등 총 552점으로 조선조에서 현대에 이르는 서화와 서예작품들을 망라하고 있다

Q. 전시 중인 작품들이 아주 다양한데 어떤 작품들을 소장하고 계십니까? 서화뿐만 아니라 한석봉,김정희,정약용,
김옥균,박영효,안중근,오세창,김구 등의 서예 작품들도 눈에 띄던데요.

A. 조선조 서화의 명가인 단원, 혜원, 오원 등 삼원과 겸재, 현재, 공재 등 삼재의 작품들이 한곳에 모여있고,
여기에다 근대 산수화 육대가의 작품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심헌(洗心軒)이라는 현판을 걸어둔 방에는
조선조에서 현대에 이르는 명가 명사들의 서예작품 등 국내.외 서화와 서예 5백여 점이 있습니다.
Q. 한 평생 서화를 수집하신 것으로 들었는데 어떤 계기로 시작하셨습니까.
A. 해방 이후부터 그림을 모으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내 방에 그림이라도 하나 있어야겠다’는 생각과 ‘아들 딸
시집 갈 때 병풍 한 조각이라도 줘서 보내야지’하는 개인적인 취미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50년대’60년대에
우리 사회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불안했던 시기에 아까운 문화재가 사방으로 분산되고 해외로 유출되는
것을 막아 나름대로 재집결시켜 보겠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지요.
Q. 공직에 계시면서 무슨 돈으로 이렇게 많은 그림을 모으셨습니까.
A. 예전에는 작품 값이 지금처럼 비싸지 않았어요. 도배할 때 고서화들을 속지로 사용할 정도로 모두들 무관심
했었지요. 3년 전 먼저 세상을 등진 아내가 국제시장에서 도매업을 했는데 그 사람한테 두 번씩이나 심각하게
이혼하자는 소릴 들을 정도로 그림에만 미쳐서 살았습니다. 아내가 내 원망 많이 했겠지요. 둘째 아들 장가갈 때
아파트 하나 장만 해 줄 돈으로 안중근 의사의 서예작품을 구입했을 정도로 작품수집에 몰두했죠.
나중에는 좋은 그림을 한 번 보면 그 작품이 눈앞에 아른아른거려 그걸 안사고는 잠도 안옵디다.
Q. 지역 나름의 특수성 때문에 미술관을 운영하시는 데 어려움이 많으시겠어요.
A. 무엇보다도 ‘이달의 문화인물’에 한석봉 할아버지가 선정된 6월에 한광미술관을 개관한 것을 큰 행운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부산은 항구도시라서 일본인들이 많이 오는데 기껏 자갈치 시장에 들렀다가 경주로 그냥
하곤 하지요. 이들에게 우리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170여점의 일본 고서화를 보여 주면 놀라곤 하는데
관광자원으로서의 가치도 있다고 봅니다. 유료입장을 고려하고 있을 정도로 경영 적자가 심각하긴 하지만
부산이 문화의 불모지라는 불명예를 씻는 것을 인생 최대의 결실로 삼고 싶습니다.

한광덕 관장은 현재의 부산상고의 전신인부산제2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재무부 사무관 등의 공직 생활을 하면서 고서화 수집을 했고, 74년에는 [국전]에서 서예작품으로 입선하기도 했으며, 지난 6월 14일에 한광미술관을 열었다.
김준기 기자
 
  평생을 모은 미술품 전시:
조선시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미술품들을 한곳에 모아 전시회를 갖고 있다.
한광덕(78, 한광미술관 관장)씨는 부산에서는 처음으로 민간 미술관을 개관하고 평생동안 수집한 서화 서예 등을 일반인들에게 선을 보이고 있다.
중구 신창동 부산은행 대치지점 4층에 자리잡은 한광미술관에서 전시하고 있는 그림은 조선시대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겸제 정선 등 작품과 박정희 전대통령의 친필에 이르기까지 손쉽게 만나 볼 수 없는 작품들이 많아 모처럼 좋은 감상의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됐다.
작품 수집에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는 한관장이 현재까지 수집한 작품은 모두 550여점. 작품을 모으기 시작할 때 월급쟁이에 불과한 그가 가능했던 것은 그의 아내 덕분이다. 아내가 조그만 장사를 해서 돈을 벌었기 때문. 그러나 이 때문에 이혼까지도 각오해야 했다고 한다. 먹고 사는데도 힘이 부치는데 “얄궂은 종이 쪽지를 사는데 왜 돈을 허비하느냐”는 부인의 볼멘 소리를 심하게 듣기도 했다. 그래서 “이혼하자”는 소리도 몇 번씩 나왔다. 그러나 이미 한관장의 말처럼 작품을 모으는데 ‘미치기 시작’한 한관장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그때는 그림 같은게 눈에 아른아른거려 마치 ‘상사병’이라도 앓는 것 같았죠”
그렇게 혼신을 다해 모은 작품이 이제 전시가 되자 기쁨도 잠시, 한관장은 걱정이 태산이다.찾는 사람들이 별로 없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부산이 문화의 불모지라는 소리를 언제까지 들을 수 없어요” 전시관을 찾는 사람들이 적어 못내 아쉬운가 보다. 수집한 작품에 눈길을 떼지 않고 조목조목 설명을 하는 열정을 가진 한관장의 이마는 세월만큼이나 깊어져 있지만 작품을 설명할 때는 제대로 숨도 가다듬지 않은 채 말을 이어간다. 많은 사람들이 전시관을 찾아 신이난 한관장의 모습을 기대해 본다.
전시관 개관 : 평일 오전 10시부터 오후5시까지, 토요일은 오후 2시까지
문의 : 469-4111
<김영섭 기자>
 
  [작가 최해군 나의 교유록] 중에서 발췌
"부산소설가협회원들의 작품 전시장으로 쓰인 한광미술관"

80년대로 들어서자 한국의 제2도시 부산답게 문학계에도 새로운 의식과 인식이 넓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중앙탈피의 독자성이었다. 종전의 한국예총의 부산지부요 한국문인협회의 부산지부가 아니라 부산의 예총이요,부산의 문인협회였다.
그게 지역이 가진 자각이었다. 그래서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에 걸쳐 '부산시인협회''부산수필가협회''부산아동문학가협회' 등 장르를 달리하는 작가군(作家群)의 집합체가 형성되면서 친목과 함께 개인이 가진 작가로서의 자질과 기량을 상호교류에서 갈고 닦으면서 독자층의 저변확대를 모색해 갔다.
부산의 소설계도 종전의 기성작가와 함께 문예지 또는 일간지를 통해 등단한 작가가 20명 가까이 되어 갔다. 그만한 인원이라면 친소의 개별적 유대관계에서 조직적 협동체제를 구성할 만했다.
그 같은 얘기가 나온 건 1981년 말 무렵이었다. 먼저 요산 김정한 선생과 향파 이주홍 선생에게 의견을 물어야 했다. 두 분은 똑같이 조직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두 분의 말씀을 요약하면 부산의 소설가도 이제 만만치 않은 수와 질을 갖추었다고,이럴 때면 조직체로서의 규합이 있을 만하다고,그러한 조직체가 형성됨으로써 상호 간의 정보교환으로 새로움도 얻을 수 있고 그 무슨 일을 하는 데 조직적인 힘도 생길 거란 것이었다.

82년 4월 20일 부산일보는 그때의 일을 다음과 같은 기사로 밝히고 있다.
'(전략)전국 지방문단 가운데서 우수한 진용과 수적 우세를 가졌으면서도 중앙집중화 경향,보이지 않는 인맥의 예속,창작에 대한 발전적 성향을 띤 비평의 기피 등 갖가지 해독요소를 몰고 와 '부산소설'을 전반적으로 침체시켰다는 것이 그동안 작가 스스로는 물론 뜻있는 독자들의 공통된 불만이었다.(후략)'
부산에서 소설가협회가 형성되었다는 소식이 이렇게 알려지자(실제 지역에서 소설가만의 단위단체가 조직된 것은 처음이었음) 서울의 '한국소설가협회'에서 연락이 왔다. 한국소설가협회(이사장 김동리)가 '유고문인(有故文人)돕기 문인서화가도예전(文人書畵家陶藝展)'을 열고 있는데 서울에 이어 부산에서 열고 싶으니 '부산소설가협회'가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쾌히 승락을 했다. 그랬더니 그 일을 전담한 도자기회사에서 우리 회원을 수영으로 오게 해서 소성(素成·흙으로 모양만 된 상태) 도자기 원형에 글을 쓰게 했다. 회원들은 제나름의 글씨 쓰기에 정혼을 쏟았다. 그 글이란 자기의 좌우명이거나 대표작의 이름을 쓴 끝에 쓴 이의 이름을 적어 넣는 일이었다. 회원들은 한자리에서 썼는데 붓글씨 솜씨가 모두 그럴싸했다.
그렇게 쓴 것이 도예품이 되어 나왔을 때는 실제 예술품인 양했다. 우리들이 쓴 것과 서울에서 내려온 문인들 것과 합한 128명의 것이 5월 24일부터 29일까지 부산 중구 중앙동의 한광미술관(부산우체국 옆)에 전시되었다. 전시작품 가운데는 유진오,송지영,김동리,정비석,이주홍,김정한의 글씨도 있었다. 팔린 대금은 불우문인들에게 성금으로 전달되었다. 이는 부산소설가협회 창립 3개월 뒤의 일이었다.